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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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 이지영 기자 ljy@cstimes.com
  • 기사출고 2024년 04월 02일 16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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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현/여우난골/1만800원

컨슈머타임스=이지영 기자 | 우리 시대의 뛰어난 서정시인이자 운율의 연금술사라 일컬어지는 고두현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가 출간되었다. 시인수첩 시인선 85번째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자연의 몸'을 받아쓰는 필경사로서의 문장을 새롭게 잇고 있다. 특히, '운율과 말맛'이라는 시의 본연을 복원하는 동시에 현대적 감각으로 그 외연을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우선 시인은 낭송의 전통을 유려하게 펼친다.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저음으로서 형상된 이 목소리의 시학은 나이테처럼 둥글게 뭉쳐지며 우리의 귓속으로 스며든다. 사물을 정확히 구분하고 분별하는 높은 소리와는 다르게, 시인의 바리톤은 침묵의 자리에서 청각의 무도(舞蹈)를 수행하면서 "사물 세계와 일상의 말을 더 잘 받아쓰기 위한 경청의 자세"를 완성한다.

확실히 시인이 계승하고 창안한 목소리의 짙은 농도와 흐름 들은 구술문화의 흔적이며, 우리의 현대시가 잃어버린 '시'와 '노래'의 대칭이다. "장진주사 마지막 구에서/ 악보 덮고 먼 산을 보네"와 같은 문장이 함의하는 것처럼, 적어도 시인에게 시는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음악적 보고가 아닐까. 때문에 고두현 시인의 문장은 지금-여기에서 당대의 시선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까마득히 먼 과거와 미래를 향한다. 이른바 부재의 긍정이자 그 민감한 형식이다.

시인 스스로가 밝힌 것처럼, 그의 문장은 혀로 궁굴리는 '입말 퇴고'의 직접적인 형식을 취하면서, 시인의 여정을 함께 걸어간 '길 위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애틋하게 풀고 있다. 속삭이는 듯한, 혹은 같이 웃고 떠들며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로서 그는 시의 공동체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사람들의 삶에 오롯이 묻어나오는 현장성마저 농염하다. "빛바랜 신발 자국 맨발을 맞대보다 백고무신 옆구리에 비친 옛집 처마의 푸른 그늘을 만져 보다"(「신발이 지나간 자리-정병욱의 이력(履歷)」)라는 염결성은, 주관적 회고나 혹은 섣부른 감상, 동정으로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는 없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시인의 작업을 명징하게 받아들이고 또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는 그 생활과 실존의 유려한 악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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