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전기안전법 파동으로 시끄러웠다. 전안법은 소상공인 생계를 위협하는 악법으로 몰렸다. 법 제정 취지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정치인들은 앞 다투어 전안법을 공격했고, 소상공인들에게 사과의 말을 쏟아냈다. 전안법은 「전기용품안전 관리법」과 「품질경영 및 공산품안전관리법」을 통합하였을 뿐 새로운 법이라고하기 무색하다.
사업자의 불필요한 부담을 경감하기 위해 기존 안전관리제도의 비효율적인 부분을 개선하고 온라인 사업자도 오프라인과 마찬가지로 소비자에게 안전정보(KC마크)를 제공하도록 추가한 정도이다. 결국 파동의 원인이 된 몇몇 쟁점들은 연말까지 유예키로 하고 전안법은 조건부로 통과되었다. 시간을 조금 벌었으니 전안법을 둘러싼 오해와 파동의 근본적인 원인을 짚어보아야 할 것이다.
이 법은 제정취지에서 밝히고 있듯이 전기용품, 생활용품의 위해로부터 국민의 생명, 신체 및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에서 만들어졌다. 제품안전기본법이 무엇(What)에 해당하는 원칙을 제시한다면 어떻게(how)에 해당하는 제품관리법이다. 그런데 왜 이 법이 민생악법(?)처럼 문제가 되었을까?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제품안전의 정부 역할과 기업 책임에 대해 합의된 원칙이 없다는 게 근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안전이란 과학적 판단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사회적으로 합의된 원칙이다. 같은 실험 결과를 놓고 해석이 다르거나 어느 나라는 금지하고 어느 나라는 허용하는 일이 생기는 이유이다. 그동안 많은 제도적 시행착오와 소비자안전사고를 거치면서 과학적으로 안전을 평가하는 인프라는 크게 늘었지만 사회적으로 합의된 안전 원칙은 자리 잡지를 못했다. 이 때문에 기업에게 당연한 안전책임을 묻는 것이 과잉규제나 규제개혁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안전 원칙은 간단하다. 우리나라의 제품안전기본법에 해당하는 유럽연합 제품안전지침(General Product Safety Directive, GPSD) 예를 보자. 제품안전지침은 "A safe products only policy"로 표현된다. 지침은 사업자가 안전한 제품만을 제조판매할 책임, 위험한 제품이 제거될 수 있도록 이력관리를 할 책임, 소비자에게 위험을 미리 알려줄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할 책임을 담고 있다. 책임을 수행할 방법은 제품에 따른 특성을 잘 아는 사업자가 제시하도록 하고, 정부는 책임이 적절하게 지켜지는지 효율적인 감독 방안을 제시하면 된다.
판매 후에 수거검사를 하고 위험이 생기면 리콜 조치를 하고 제조업체로 하여금 피해 보상책임을 지도록 하는 사후관리체계는 매우 중요하지만 사전규제의 종속적 정책일 수밖에 없다. 유통과정이 투명하지 않고 영세사업체가 많아 사후관리가 효과를 거두기 어렵고, 불안, 불신까지 높은 사회비용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소비자의 안전 피해는 건강, 생명과 직결된다. 보상받은들 잃은 건강과 생명을 돌이킬 수 없으니 금전적인 보상으로 해결할 수 없다. 다른 소비자 피해 유형과는 달리 적절한 피해보상이 불가능하다. 피해 정도를 밝히는 것도 어렵지만 소비자가 피해 사실을 인식하기조차 어렵다. 금방 눈에 드러나는 상해사고라면 몰라도 피해를 입고도 대부분의 소비자는 모른 채 지나친다. 가습기살균제 참사에서 보듯이 아기들이 시름시름 죽어갈 때조차도 그것이 가습기살균제 때문인지 몰랐다. 피해가 생겨도 소비자로서는 피해구제를 요구하는데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추측도 증명도 어렵고 구제과정도 복잡하고 결과도 불확실하니 소비자는 망설이고 포기하게 된다.
행정규제 수준을 높이고 집단소송제를 확대하고 징벌적 피해보상 수준을 높여서 업체가 스스로 사전예방하는 효과를 기대한다지만 생활용품 산업 현실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안전표시제도도 알지 못하는 소규모 영세업체가 여전히 많고 부도나는 업체가 상존한다. 막상 소송까지 갈 수 있는 안전사고도 다수의 소비자 피해이거나 피해정도도 꽤 심각한 경우일 것이다.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화평법 제정 당시 기업 부담이 가중되며, 소비자용도에 쓰는 화학물질의 생산량이 적다는 이유로 등록 면제를 하면서 발생한 문제이기도 하다. 안전책임에 예외는 없어야 한다. 전안법을 둘러싸고 소상공인, 온라인사업자의 부담 호소가 많다. 그러나 안전책임의 면제나 축소는 가야 할 길이 아니다. 위험 예방 원칙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사업자 특성에 맞는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소상공인의 부담은 책임의 면제나 축소가 아니라 절차의 간소화나 인프라 공유방안 등을 통해 해결하여야 할 것이다.
온라인 제품은 덜 안전해도 되고 소량생산이나 맞춤형생산 제품은 덜 안전해도 된다는 것은 잘못된 공식이다. 소비자들은 경제성, 편의성, 디자인가치 등의 더 많은 편익을 위해 온라인 구매를 하고 맞춤형생산 제품을 선택하는 것이지 안전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다. 안전은 거래나 협상의 조건이 아니라 거래 이전에 제조판매의 조건이어야 한다. 온라인 판매 제품이나 중소업체의 제품이 덜 안전할 수 있다는 소비자의 우려가 오히려 산업 성장에 장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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