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이시하라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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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이시하라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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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에도 봄이 지나갈 무렵/ 우리들만이 쓸쓸히 바라보던 멀리 떠나는 구름이여/ 아카시아 꽃잎도 떨어지고/ 그녀에게 남아 있는 붉은 손수건.<赤いハンカチ. 붉은 손수건>

오래된 주점에서 소문으로 들었네/ 그녀가 떠났다는 사실을/ 창밖에는 가을바람에 낙엽이 진다/ 어디에서 찾을까 그녀의 가느다란 그림자/ 밤의 오타루는 안개에 묻혀있네.<北の旅人. 북쪽의 나그네>

일본의 전설적 가수이자 국민배우 이사하라 유지로(石原裕次郞)의 노래들이다. 나그네의 상념을 담은 선율에 우수로 채색된 목소리가 섞이면 아무도 이별과 고독을 피해갈 수 없다. 애틋함과 호소력 짙은 느린 창법이 독한 중독으로 다가오는 노래다. 수많은 히트곡과 영화를 남긴 그는 스타가 되어서도 반항적인 삶을 살다가 53세의 짧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나훈아와 신성일을 합쳐놓은 정도라고 해야 할까. 일본인들은 병적일 정도로 유지로에 집착한다. 톱 가수에 영화배우로 성공한 뒤에는 요트타고 수십 대의 명차를 소유하는 귀족적 삶으로 숱한 화제를 뿌렸다. 가라오케 애창곡은 아직도 유지로 리스트가 상위권이다.

일본인들의 기타구니(北國)는 시베리아나 러시아가 아니라 북해도다. 국토의 맨 상단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땅 홋카이도(北海道)는 미지의 세계이고 보통사람들의 꿈이 담긴 지역으로 신성시되어 왔다. 역사적으로 일본의 중심지인 오사카나 도쿄에서 보면 거리도 멀고 사람이 적게 사는 오지여서 자연스럽게 개발도 늦어졌다. 그 덕분에 지금은 오히려 세계적인 에코랜드로 자연휴양지가 되었지만.

홋카이도의 서쪽에 작은 항구 도시 오타루가 있다. 우리 동해를 마주하는 지역이다. 140여 년 전 메이지 유신정부가 들어서고 사카모토 료마의 구상대로 홋카이도가 개발되기 시작할 때 물자와 사람을 수송하던 작은 포구였다. 끝없는 자작나무 숲과 아름다운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천혜의 비경이 일품이다. 왜 일본 최고의 미항인지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글깨나 쓰고 예술 좀 한다는 일본사람치고 오타루를 동경하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만큼 이곳은 사람의 원시적 감정을 흔들어 깨우는 그 무엇인가를 간직하고 있는 파라다이스로 구전되어 오고 있다.

삿포로에서 기차를 타고 오타루역에 내려 안내소에서 지도를 받아 들었다. 걸어서 가기는 멀고 할 수 없이 택시를 탔다. 유지로의 노래를 허밍으로 흥얼거리던 20여 년 전부터 궁금하던 곳이었다. 톱스타를 추모하는 오타루의 기념관은 쓸쓸했다. 바닷가 텅 빈 공터에 자리한 L자형 2층 건물은 수평선과 맞닿아 있었다. 중년의 단체 방문객들 틈에 끼어들어 평소 그가 아끼던 애장품들을 둘러보았다. 유지로는 고베에서 태어났다. 미쓰이 상선에 다니던 아버지를 따라 오타루에서 어린 시절 7년을 보냈다. 그런 인연으로 오타루 주민들은 이시하라 유지로 기념관을 만들었고 해마다 방문객은 백만을 헤아린다.

▲ 오타루 남쪽 해변에 자리한 이시하라 유지로 기념관 앞에서

사실 불량청년이었던 유지로를 영화배우로 또 가수로 키워낸 사람은 바로 그의 친형인 소설가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郞)였다. 자신의 출세작 '태양의 계절'을 영화로 만들면서 동생을 주연으로 발탁했던 것이다. 소설가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신타로는 극우의 첨단을 걸었다. 8선 의원에 두 차례의 장관, 4번의 도쿄 도지사를 지내는 동안 그의 입은 우파를 자극하는 화염방사기였다. 마침내 지난달에는 울트라극우 신당을 만들어 일본을 통째로 바꾸겠다며 도지사 직도 버렸다. 동생은 예술에 묻혀 가고 형은 살아서 일본의 보수를 자극하느라 동분서주하고 있다.

"종군위안부는 사실상 매춘부였다", "일본은 다시 핵무장을 하고 아시아를 주도해야 한다", "동일본 쓰나미는 일본인들에게 하늘이 내린 천벌이다"

보통사람들이 금기시하는 섬뜩한 말들을 신타로는 거침없이 내 뱉는다. 일본제국주의 피해를 직접 당한 중국과 한국인들은 반복되는 독설에 이골이 났다. 자민당이 달래고 민주당 정부가 비판해도 안하무인이다. 갈때까지 가보자는 식의 언행과 이를 즐기는 세력이 아직 일본에는 많다. 그게 바로 이 노정객이 인기를 모으는 비결이다. 최근에는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과 손을 잡고 '이시하라 신당' 간판을 달았다. 성공한다면 또 다른 파장이 예고된다.

'노(NO)라고 말해야 하는 일본(Noと言える日本)'이라는 베스트셀러로 미국과의 평등관계를 주장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때와 달리 신타로는 이제 70을 넘어 노쇠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지나치게 선동적이고 국제관계를 무시한 거친 발언으로 주변사람들을 화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시하라 세력은 견고하다. 우리가 잘 모르는 일본의 색다른 보수 DNA를 자극하는 천부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의 장남 이시하라 노부테루는 지난 번 자민당 총재 경쟁에서 아베 신조에 패했다. 벌써 중의원 다선을 거친 거물 간사장이다. 차남 요시즈미는 TV 진행자로, 셋째 히로타카는 자민당 중의원, 넷째 노부히로는 화가로 모두가 언론의 관심거리다.

예술로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했던 동생은 가고 없는데 형은 혀 세치 독설로 아직도 극우보수층을 흥분시키고 있다. 가는 길은 달랐지만 어쨌거나 이시하라 형제는 보통의 일본사람들에게 영웅적 대접을 받는다. 두 사람의 인생행로를 바라보는 이웃나라 기자에게는 살아있는 형 신타로가 어쩐지 측은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세상은 바뀌었는데 아직도 과거를 파는 흥행사 같다고나 할까. 동생의 노래는 좋지만 형의 거친 정치는 좀 더 정제되었으면 하는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도발적인 극우 발언을 접하면 우선 감정부터 끓어오르고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우파를 선동하는 신타로의 사진과 뉴스가 대문짝만하게 실린 신문을 들고 유지로 기념관을 빠져 나왔다. 해변에는 늦가을바람이 차갑다. 죽은 동생과 살아있는 형의 이야기가 정리되지 않은 채 혼란스럽다. 인간의 원초적인 향수와 고독을 노래하다 떠난 동생이 도발적 보수의 아집을 놓지 못하는 형을 아직은 덮지 못하는 분위기다.

오타루 시내로 달려 들어오는 기차소리에 석양이 머문다. 한쪽에서는 한류와 말춤에 열광하는데 다른 쪽에서는 아직 극우의 그림자가 무겁다. 이것이 일본의 모습이다. 이시하라 형제의 엇갈리는 이미지가 허공으로 흩어진다. 조건 없이 사랑하고 공존할 수 있는 예술처럼 정치는 어느 때쯤에나 그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까. 한 일 두 나라가 감정싸움으로 소비하는 에너지는 공존을 원하는 미래세대에게 너무나 무거운 짐이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cs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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